오늘의 역사 공민왕(05.06)

2020. 5. 6. 20:41History of today

옛날 우리는 음력을 사용했습니다. 5월 6일에 국내에 다른 역사를 찾지 못하여 음력 1330년 5월 6일 출생인 공민왕에 대하여 찾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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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yoosi0211.tistory.com/entry/꺼져가는-고려의-마지막-불꽃-공민왕-최후

공민왕

 고려 왕조 제 31대 임금. 시호는 고려 우왕이 독자적으로 올린 '경효대왕(敬孝大王)', 명이 준 '공민왕(恭愍王)'.  간혹 고려에서 올린 시호 '경효대왕(敬孝大王)'을 따서 '경효왕'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25대 충렬왕의 고려 시호도 '경효왕(景孝王)'이라 혼동할 수 있어 실제론 많이 쓰이진 않는다.

 

 고려식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공민왕의 아들이자 후계자 강령부원대군 왕우는 위화도 회군으로 비참하게 몰락하고 손자 왕창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힘도 한번 못 썼으며 끝내 둘 다 신돈의 후손인 신씨(辛氏)로 몰려 처형당한다. 후대 조선왕조는 이 두 사람을 왕씨(王氏)도 아니며 옥좌를 찬탈한 역적으로 간주하여 아예 두 사람의 휘를 그대로 쓰며 고려사 세가에 넣지 않고 고려사 열전 반역조에 넣어 비난했다. 창왕의 뒤를 이은 공양왕은 어떻게든 고려를 지키기 위해 이성계에게 군신동맹을 맺자고 하며 끝까지 선양을 하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강제 폐위되어 내쳐진다. 이를 보면 고려 후기 군주 중 마지막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군주였다. 그래서 사실상의 고려의 마지막 군주라고 봐도 무방하다.

 

 고려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고 충렬왕 대부터 5묘제 태묘를 사용하고 묘호를 올리지 못하게 됐다. 원 묘호가 올려진 임금들은 모두 시호로 격하됐다. 충렬왕 대부터 원의 간섭으로 시호조차 올리지 못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원 천자의 제후로 편입되었기 때문. 즉 신하로서 군주에게 시호를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고려사 예지 태묘조엔 공민왕은 다시 7묘제 9실 제도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이 종묘에 섬긴 아홉 군주는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이다. 잘 보면 원(原) 묘호가 올려졌던 임금들은 모두 묘호가 회복됐지만 묘호가 없던 군주들은 묘호를 추가로 올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이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쇠퇴한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 여력이 남아있던 원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 종묘 제도는 천자의 제도를 따르되 묘호는 따로 올리지 않았다. 

 

 대신 공민왕은 충렬왕 이하의 군주에게 다 시호를 독자적으로 올려 어느 정도 선까지 자주성을 회복시켰다.  그래서 공민왕 본인 역시 묘호가 없다. 대신 고려가 다시 자주적으로 올린 시호가 있다. 후계자 강령부원대군 왕우가 재위 2년에 올린 시호는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다. 약칭은 '경효대왕(敬孝大王)'. 명이 시호를 보내주기 전까진 경효대왕으로 주로 불렸다.  당시 고려가 상국으로 우대하던 명나라는 우왕 재위 11년에 '공민왕(恭愍王)'이란 시호를 보냈다. 이 시호가 간단하다 보니 보통 이 시호로 알려져 있다.  양국의 시호를 합쳐 '공민인 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恭愍仁文義武勇智明烈敬孝大王)'이라고도 한다.

 

내정

 왕이 되자마자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할 때 파악한 원의 쇠퇴를 믿고 본격적인 반원 정책을 펼쳤다. 그 첫 신호탄으로 1356년에 병신정변을 일으켰다. 

 

 먼저 무신들의 회의 기구이자 권력 독점 기반이었던 정방을 혁파했다. 공민왕이 펼친 반원 개혁들과는 달리 이것은 무장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를 악몽으로 물들게 한 무신정권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한 공민왕은 무인들의 발호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원의 연호와 관제 사용을 폐지했으며 원의 풍속인 변발과 호복 사용을 전면 금지시켰다. 또한 기황후의 인척임과 동시에 고려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친원파 무리들 중 하나이자 갖은 전횡을 일삼던 기철 일당을 중심으로 한 부원배 세력의 숙청에 나섰고, 기철의 동생들을 빼곤 아내와 어린 자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였다. 

 

 한편 전민변정도감을 세워 기철 일당이 점탈 했던 인구와 토지를 재빠르게 정리했으며,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등용 및 육성하면서 제법 의욕적인 개혁 정책을 펼쳐 나갔다. 성적 면에서도 스스로를 절제했으며, 신하들에게도 예의를 갖추었다.  

 

 이 즈음의 공민왕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극찬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부원배를 제거하면서 공민왕이 들었던 명분 중에서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정한 원칙인 세조구제(世祖舊制)를 기철 일파가 어겼다'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쿠빌라이가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직접 통치를 하지 않고 독자적인 내정 운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근거로 삼아, 고려를 원에 들어다 바치려는 책동을 하던 부원배들을 다름 아닌 원나라 황제의 이름으로 제거해 버린 것이다. 참고로 세조 구제는 후대의 칸들도 못 건드렸을 정도로 강력했다.  

 

 당대의 신진사대부의 대표격인 인물들은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으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조선 왕조의 주요 개국 공신이 되었다. 단 이들 중에서도 조선의 개국에 기여한 이들은 정도전 등의 급진파 신진 사대부들로, 이들 가운데서도 정치적인 스펙트럼의 차이는 꽤 큰 편이었다. 또한 정몽주는 당시에도 명사였긴 했지만 총체적으로 정몽주와 정도전을 포함한 사대부들은 젊은 세대로서 공민왕 말기까지는 소장 관원, 간관으로서 존재했을 뿐 정치적으로 딱히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공민왕이 중책을 맡겼던 관료들은 이제현과 그의 제자였던 이색, 그리고 이인임의 형인 이인복과 같은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해본 경험이 있는 재상들이었으며, 이들은 양심적이고 성실한 동시에 학문의 성취가 높은 편이었지만 동시에 이후의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기존의 기득권과도 일정 부분 얽혀 있었다. 한편 그 밖의 요직에 자신의 측근들(연저수종공신)과 외가 쪽 친척인 홍언박(공민왕의 외사촌 형이자 홍륜의 조부), 인척인 경복흥 같은 사람들을 기용했다.

 

반원정책

그러면서 공민왕은 차츰 원나라부터의 독립을 추진하였으며, 독립과 칭신을 반복하면서 한편으로는 세를 잘 봐서 결국 부원배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또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지금의 함경남도 등)에 무력 공격을 감행, 함락시키면서 원에 굴복한 이후 상실한 동북 지역의 영토를 수복했는데 이때 이자춘 -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했다. 그리고 이름만 남아 있던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도 폐지시켰다.  하지만 그 탓으로 북쪽 지역에서 원나라 장군이자 요동의 군벌이었던 나하추의 침입과 오빠 기철을 죽인 데 앙심을 품은 기황후가 원혜종을 설득하여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조카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세자로 즉위시키기 위해 침입한 최유의 침공이 있었다. 또 남쪽에서는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자 헬게이트.

 

 한편 지난날 원종이 내전 중이던 쿠빌라이 칸에게 칭신 해 국체를 보존했듯이, 공민왕도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나라에 곧 칭신 하여 명 태조(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가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하고 곧장 제후왕으로 책봉될 정도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요동 정벌을 위한 준비였다. 이미 기씨 일파의 숙청으로 관계가 나빠진 북원과는 국교를 단절하였다.

 

요동정벌

 제1차 요동 정벌은 발해가 멸망한 지 445년 만에 고려가 처음으로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 사건이자 한반도 국가가 마지막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유했던 시기였다. 이성계가 처음 큰 전공을 세운 전쟁이기도 하며, 따라서 용비어천가와 고려사에도 그 경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때 공민왕은 원을 압박하며 국력이 강성해지고 있던 명나라를 경계해 기철 일파와 원 잔당의 토벌을 명분으로 요동으로 군대를 보냈다. 총책임자는 이인임이었으며 야전군 총사령관인 지용수를 필두로 이성계, 양바얀, 임견미가 함께 군대를 이끌었다. 당시 기철의 아들인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요충지인 요동성을 근거지로 삼고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도주했다. 

 

 그리하여 원정군은 요동성의 점령까지 성공하는데 하필 성내의 군량고에 아군의 실수로 불이 붙어 군량이 타버린 와중 무리한 영전공사 등으로 인해 본국의 군량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물자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후퇴할 때 총사령관 지용수가 해안선을 따라 움직이도록 해서 동선이 길어지는 등의 일로 부대 내 불만이 커졌으며, 결국 전투 후반에 전사자보다 굶주림과 추위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 반발한 명이 고려에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요동의 여러 군벌들이 고려와 명 사이에서 결국 명에 투항하거나 명의 압력에 북원으로 도주하면서 요동 정벌은 결국 좌절되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일시적으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그 뒤로 지금까지 한반도 국가의 영토가 요동에 미치는 일은 없었다.

 

죽음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1372년 젊고 외모가 잘생긴 청년을 뽑아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곁에 두고 좌우에서 시중을 들게 하였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자제위 중 한명인 홍륜(洪倫)이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하였는데, 내시 최만생(崔萬生)이 은밀히 왕에게 보고하자,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 겠다."고 말했다이에 두려움을 느낀 최만생은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날 밤에 홍륜은 권진(權瑨), 홍관(洪寬), 한안(韓安), 노선(盧瑄) 등과 더불어 모의하여 술에 취한 공민왕을 칼로 찔러 죽이고는 '도척이 침입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위사(衛士)들은 벌벌 떨기만 하고 움직이지 못하였으며, 재상과 백집사들은 변을 듣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날이 밝을 무렵에 명덕태후가 강녕대군(江寧大君) 우(禑)를 데리고 내전에 들어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이인임(李仁任)은 처음에 승려인 중 신조(神照)가 항상 대궐 안에 있었으며, 완력이 있고 남을 속이는 꾀가 많았으므로 그가 난을 일으킨 것이라 여겨 감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풍과 최만생의 옷 위에 피가 뿌려진 흔적이 있음을 보고서, 이에 최만생을 하옥시켜 국문(鞫問)하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었다. 최만생과 홍륜을 비롯하여 변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하고 그들의 삼쪽 또한 멸족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이인임에 의해 어린 우왕이 즉위하면서 이인임의 섭정이 전개되었다. 우왕은 공식적으로 궁녀 한씨의 소생이었으나 실은 신돈의 여종인 반야의 소생으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에 시달렸으며, 이성계 일파는 이를 사실로 내세워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닌데도 고려의 왕권을 찬탈하여 고려 왕조의 맥이 끊긴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생각정리

 10년도 더 이전에 한번쯤 읽어 봤을 것 같은 고려 31대 왕 '공민왕'의 내용은 얼핏 들어본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직 역사의 퍼즐 한 조각을 큰 도화지에 제멋대로 위치한 느낌입니다. 앞으로 다른 퍼즐이 지금의 퍼즐과 만나 하나의 선이 되고 그 선에 흐름이 보일 때 그때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퇴근하고 차분히 글을 읽으면 복잡하고 어려웠던 업무와는 달리 부드러운 흐름과 결과에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각자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볼까요 ;)

 

감사합니다. 

 

Reference 

 

공민왕 - 나무위키

천성이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심복대신이라도 권세가 커지면 의심해서 죽였다. 조선조 들어서도 태조를 처음 등용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손으로 멸망시킨 왕조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사당까

namu.wiki

 

 

고려 공민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민왕(恭愍王, 1330년 5월 23일 (음력 5월 6일)[1] ~ 1374년 10월 27일 (음력 9월 22일), 재위: 1351년 ~ 1374년)은 고려의 제31대 국왕이다. 초명은 기(祺), 휘는 전(顓), 몽골식 이름은 바얀 테무르(몽골어: ᠪᠠᠢᠠᠨᠲᠥᠮᠥᠷ Bayan Temür, 한국 한자: 伯顔帖木兒 백안첩목아)이며 호는 이재(怡齋)와 익당(益堂)이다.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차남이며 충혜왕의 동복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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