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한국전쟁:포로수용소 소요사태(05.07)

2020. 5. 7. 23:19History of today

이 글은 정확하지 않은 내용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잘못 표시된 내용이나 개선돼야 할 내용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거제도_포로수용소#폭동_사건

포로수용소 소요사태 (폭동 사건)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1952년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동이 일어났다. 보트너 준장은 6월 10일에 도드 준장을 구출하면서 포로를 분산 수용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1951년 2월에 현재의 거제시 고현동과 수양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1953년 7월까지 운영된 포로수용소이다.

 

 

생각정리

 한국전쟁은 뼈 아픈 과거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새싹들과 꽃잎, 그리고 고목들이 쓰러졌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을 새까맣게 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잘못 보다는 차이가 있는 서로의 입장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남과 북 그리고 그 이외에 연관된 모든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Referece